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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png영의정領議政 이천梨川 홍주弘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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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명종 17~1638.인조 16별세

공公은 정종대왕定宗大王의 4남 선성군宣城君의 6세손으로 삼자三子 명산도정공明山都正公 금정金丁을 고조高祖로, 하양군河陽君 옥형玉荊을 증조曾祖로, 파천군坡川君주珠를 祖로, 아버지 군수郡守 극인공克仁公,(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과 어머니, 이조참의 유환吏曹參議 兪煥의 따님 사이에서 (1562년明宗17) 한양漢陽의 청빈淸貧한 관료官僚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시었다.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의 어려운 시기에 50여년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시고, 1638년(仁祖16)에 77세로 별세하셨다. 이 후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다.(1643)

아들로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헌방과 안방安邦이 있다.

 

1) 3대를 섬긴 이천상공 년보梨川相公 年譜

공公은 선조宣祖15년 출사出仕하여 광해와 인조仁祖의 3대에 걸쳐 하위 관직에서 출발出發하여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내외직內外職을 넘나들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50여년을 혼란의 시기에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였다.

 

2) 문신文臣으로 군사軍事를 아는 재상

문신文臣으로 출사出仕하였으나, 선조宣祖 27년 훈련도감訓練都 을 설치하여 유성룡이 도제조都提調로 군사를 양성養成 할시 낭관郎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기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으로 참전參戰을 하였으며, 왜군토벌倭軍討伐을 위해 중군中軍의 직책을 맡아 충청도에 파견되는 등 전환기轉換期에 중요 역할役割을 감당勘當하였다.

 

1606년 함경도 점군어사咸鏡道點軍御史로 육진六鎭을 살피며 방비防備를 철저히 하도록 조치하였으며, 1621년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로 육진六鎭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북방의 방비防備에 대한 대책을 건의建議 하였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시에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병病이 위중危重할때, 정협鄭曄, 홍서봉洪瑞鳳이 이홍주는 군사를 통솔統率할 적임자適任者로 융사戎事를 익히지는 았으나, 군무軍務에 밝으며 평양,의주를 맡아서 청렴淸廉하고 삼가는 정치政治를 하였으며, 군민郡民이 따랐으며, 두 도道의 방백方伯을 지냈고, 기쁨과 노여움이 얼굴에 나타내지 습니다라고 추천推薦을 하니

 

상上께서

……여러 의견意見이 경卿(이홍주를 말함)을 가장 먼저 추천推薦하니, 나 역시 전임傳任하는 마음이 깊도다. 경卿은 바탕이 본래 아결雅潔하고 지조志操가 견정堅貞하였다. 희노喜怒가 외모外貌에 나타나지않으니 누가 천심淺深을 엿보아 헤아리겠으며 성색聲色의 동요動搖가 없으니 조급할때에 더욱 간아하였다. 젊어서부터 충성을 다하는 낭료郞僚로서의 청명淸明은 원로반 鷺班에서 특심하였고, 중년에는 천천遷遷(자주 옮겨다님)하였으나 주군에서의 겸절 節은 빙상氷霜과 같았다. 한발 물러나 자신을 지키니, 이세利勢의 기회에 마음이 없었고, 확고確固하여, 동요動搖 이 없으니 혼탁混濁한때에 몸을 온전히 하였다.

 

이는 바로 충량忠亮한 어짊이니, 아름다운 성망聲望이 있음이 마땅하도다… 경卿의 아량雅量은 군정軍情을 진정할만하고 청절淸節과 더불어 본디 중망衆望을 흡족히 얻었음에 있어설랴! 하시며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난亂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3) 당쟁黨爭 지양止揚 국정운영國政運營과 인사행정人事行政

선조124><088E宣祖,광해光海,인조仁祖시에는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이 파당을 이루었으나, 공公은 국정운영國政運營에서의 최대역점最大力點을 당색제거黨色除去에 두었다.

 

공公은 조정朝廷에서나 밖에서나 정론政論을 펼때는 한번도 당론黨論과 당색黨色을 거론치 았다. 서남대립西南對立과 노소분열老少分裂의 조짐이 분명 할 시점 서인西人의 송시열宋時烈과 남인南人의 윤휴尹瓗로 대표代表되는 서남西南간의 주자경전朱子經典의 주해註解에 대한 사정론邪正論과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야기 된 기해예송己亥禮訟에 쏠려 있었으나, 세조世祖조에 제정制定된 국조오 의國朝五禮儀에 근거根據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主張하여 정국政局을 이끌었다.

 

또한 이완李浣이 인조2년(1624)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도원수都元帥인 공公의 선전관宣傳官으로 막하幕下에 두고 자문諮問하는 등 인사人事에 편견偏見을 두지 았다.

 

4) 사은겸謝恩兼 천추사행千秋使行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다.

 

1619년 명나라에(光海11) 공公을 정사正使로, 부사副使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지제교知製敎 김수현金壽賢, 서장관書狀官에 조산대부 행호조좌랑겸 사헌부 감찰朝散大夫 行戶曹佐郞兼 司憲府 彪 김기종金起宗을 비롯하여 50여명의 사신단使臣團을 이끌고 다녀왔다.

 

당시 후금後金이 흥기興起하여 국제정세國際情勢의 혼란기混亂期에 외교관外交官의 역할을 다하고, 출발出發에서 도착到着시까지의 모든 사항事項을 일기日記로 기록記錄하여 사행일기使行日記를 남기시어 전해지고 있다.

 

5) 병자호란시丙子胡亂 時 강화교섭講和交涉 활동活動

조선朝鮮이 왜란倭亂을 겪는 동안 여진족女眞族은 크게 흥기興起하여 후금을 건국建國하고 명나라를 위협威脅하였다. 선조宣祖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光海君은 국제정세國際情勢에 현명賢明하게 대처對處하였다.

 

인조仁祖 즉위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인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不滿을 품고 난亂을 일으켜 곧 진압鎭壓되었으나, 잔당殘黨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광해군光海君의 폐위廢位와 인조仁祖 즉위卽位의 부당성不當性을 호소呼訴하며 후금의 침략侵掠을 요청要請하였다. 인조 5년(1627) 후금이 平山으로 침입侵入하여 강화도江華島로 피난避難 후, 화의和議를 청하여 형제兄弟의 맹약盟約과 조공租貢을 이행移行키로 약속約束하고 후금이 철군撤軍하였다. 공公은 당시當時에 호태감胡太 의 접반사 직임職任을 수행하였다.

 

후금의 태종太宗이 황제皇帝라 칭하며 국호國號를 청淸이라 고치고, 인조 14년(1636) 조선朝鮮과의 관계關係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맺을 것을 요구要求하며 1636년 12월8일 청태종이 10만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 침입하였다. 전쟁戰爭 부터 화의和議가 시작되었으나 12월14일 한성漢城근교까지 쳐들어 왔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避身 하자. 항복降伏과 소현세자를 인질人質로 보낼것을 강요하였다.

 

당시 우의정右議政인 공公은 최명길, 윤휘를 대동하고 청국과 수차의 협상을 벌였으며, 1월21일 공公은 최명길과 같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군진영淸軍陣營으로 갔으나 청군淸軍측에서 국서國書와 회답回答을 거부拒否하여 이에 공公은, 용골대에게 “정묘년丁卯年이래로 귀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형제지국兄弟之國이었는데 이제 우리가 귀국에 신하臣下의 국서國書까지 올렸으니 이로서 우리는 이미 지극한 성의誠意를 보인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귀국貴國이 우리가 수락受諾하기 어려운 무리無理한 요구要求를 한다면 우리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고 뜻을 밝혔다. 이후 수차 화의교섭和議交涉을 벌여 1월30일 인조仁祖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출성出城하여 청태종에게 항복降伏하는 치욕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일단 마무리 되었다.

 

공公은 화의교섭和議交涉에 임하였으나, 끝까지 항복降伏에는 반대反對하였으므로, 청국에서 끌어가려 하였으나 고령으로 이를 면하였다.

 

6) 청렴淸廉과 검소儉素로 일관一貫한 관직생활官職生活

국조인물지 國朝人物誌와 기년편고紀年偏攷에 의하면 公은 천성이 그럽고 관대하여 평생 언소言笑가 적었으며,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기를 좋아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사양辭讓하고 오래있지 았다 하였으며 관직官職에 있을 때에도 청렴淸廉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김령金 의 계암일록溪巖日錄에 의하면, 전 안동부사 이홍주가 다스림이 청간請 하였는데 떠날 때에도 행장行裝이 조촐하였다. 고을사람들이 그 궁핍窮乏을 염려하여 면포綿布 10 을 실어다 얹어 주었으나, 모두 받지 았으니 가히 청백淸白하다 하겠으며, 또한 이 홍주는 관부官府에 있으면서 청백하여 추호도 취하는 것이 없으니, 떠난 뒤에 이민吏民이 추사追思하여 면포綿布 30여을 보내주니 모두 받지 았다.

 

지금의 부사府使 박동선朴東善은 전관前官과는 현저히 달라 부고府庫가 바닥나니, 온 경내境內가 원망하고 한탄하였다고 기술記述되었다.

조선시대 사 에 의하면 영의정領議政 이홍주가 사단辭單을 올리고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는다고 비답批答하였다. 이홍주는 사람 이 활정活靜하고 몸가짐이 청약請約하여 비록 의정議政으로 있었으나, 집안이 썰렁하여 마치 관직이 없는 사람과 같았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영상領相 이홍주가 지금 사단辭單을 올리고 해직解職을 청하고 있기에 늠료凜料를 받지 습니다. 전에는 대신大臣이 늠료凜料를 받지 아니하여 창관倉官이 실어다준 예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예대로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 하였다.

 

7) 문묘중수비文廟重修碑를 쓴 명 가名筆

공公은 천품天稟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어려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文을 익혔다.

 

공公이 남긴 적筆跡은 그리 많지 않으나, 해동호보海東號譜에는 글씨를 잘쓰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고 소개紹介하고, 동국문헌 원東國文獻筆苑에는 촉체蜀體로 이름이 났다고 하였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해체解體와 서草書를 잘썼다 하고, 광해光海10년 지석도감誌石都에서 지문誌文의 글씨를 쓸때 공公과 김현성金玄成을 시켜 쓰게 하였으며, 인조仁祖 6년 가례 때 죽책서사관竹冊書寫官의 임무를 수행隨行하여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下賜 받았다.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에는 양주楊洲에 있는 이희선의 묘갈墓 과 용인에 있는 이계의 묘갈墓을 썼다고 하였으며, 사적史蹟143호로 지정指定된 문묘중수비文廟重修碑를 쓴 것으로 유명有名하다.

 

또한 의정부시議政府市 고산동高山洞에 소재所在한 공公의 부친 극인공克仁公의 묘갈墓碣을 최립崔笠이 찬하고, 전라감사 시全羅 疱 時 공公이 직접 썼다.

이유원이 편찬編纂)한 임하 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우리나라 글씨는 김생金生을 근본根本으로 삼는데 진체晉體에 가깝고, 박팽년, 안평대군, 강희안, 김현성, 이홍주, 신익성을 촉체蜀體라 하고, 이황, 양사언, 한호는 진체晉體라 하였다.

 

8) 묘지명墓誌銘

공公이 77세로 1638년 서거하시어, 의정부시 고산동 산 116-1 선영先塋 뒤에 안장安葬할 때에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이 글을 짓고, 당시 명 인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公이 글씨를 쓴 묘지명을 묻었다. 이 묘지명은 36.8×56cm의 대리석 2장으로 전면前面은 의정부 영의정 이공 묘지議政府 領議政 李公 墓誌라 쓰고, 안 2面은 본문本文이며, 후면은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수홍문관 대제학 지성군관사 동지 성균관사 동지 경봉사 이경석 찬, 숭록대부 동양위 신익성서 ⑸漢梭 吏曺參判 兼 守弘文館 大提學 知 成均館事 同知 經筵事 李景奭 撰, 崇錄大夫 東陽尉 申翊聖書라 되어 있다. 이 묘지명은 6.25 전쟁으로 묘역墓域이 미군부대로 편입編入되어 1980년경 공公의 조부祖父와 부친묘소父親墓所의 뒤로 천묘遷墓하는 과정에 발굴發掘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京畿道 博物館에 위탁委託 보관保管하고 있다. (내용은 仁德誌 2호 게재) 묘지명墓誌銘의 일부를 소개紹介하면, 타고난 자품이 매우 높아 평소의 언행이 저절로 도道에 맞아들여지지않는 것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때는 하루 종일 똑바로 앉아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기풍이 온화溫和하면서도 엄격嚴格하여 노여운 감정 程 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았으나, 일에 부딪히면 꿋꿋하고 당당하여 함부로 범접犯接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정직正直하다고 평가評 하였다.

차림새나 물자物資를 쓰는 것도 검소儉素하였고, 생활 형편이 보잘것 없어 오두막집에 풀방석으로 거처 하였지만 그저 태연하였다.

 

정자나 서를 잘 쓰는 문제를 가지고 말한다면 공公에게 있어서야 대수롭지 은 일로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솜씨였다.

공이 별세別世하던 날 내가(李景石) 달려가 살펴보았는데 병세가 이미 위급危急해져 숨이 거의 끊어질듯 하면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었고, 말마디가 하나도 어긋나지 았으며 별세하기 몇 각 전에 옆 사람에게 머리를 빗질하게 한 뒤 스스로 상투를 틀었다.

 

나이가 80이 가까웠고 병을 앓은 지 오래 되었으나, 별세할 시에 여유 만만하여 이와 같이 정상적인 자세를 유지維持하였으니, 평소에 몸가짐을 어떻게 했던가를 또 한 알아볼 수 있다.

9월에 양주 내송산 선영先塋의 곁에 장사葬事 지냈다.

 

9) 맺음말

공公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이괄李适의 난亂등 격변기激變期에 전쟁戰爭을 겪으며 험난한 시기에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의 3대에 걸쳐 50여 년간 내외직內外職의 다양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면서 당쟁黨爭에 휩싸이지않고, 최고직最高職인 영의정領議政까지 오르며 청렴淸廉과 검소儉素로 일관一貫 된 삶을 살았다.

 

출사出仕한지 얼마되지 아 부모상父母喪을 당하고, 임난시壬亂時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의 종사관從事官과 훈련도감訓練都 의 낭속廊屬으로 직임職任을 수행隨行하고, 왜군토벌倭軍討伐을 위해 중군中軍의 직책職責을 맡아 충청도忠淸道에 파견 되는 등 역량力量을 인정認定받았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외직으로 강서현령江西縣令으로 나갔다가, 함경도 감군어사監軍御使로 육진六鎭등 변방邊防의 방비책防備策을 점검點檢하였다. 그리고 평양서윤平壤庶尹 의주부윤義州府尹, 안동부사安東府使,동부승지同副承旨,전라감사全羅 疱 등 내외직을 넘나들었다.

후금이 흥기興起하여 명나라와의 관계關係가 미묘하게 전개되는 시기에 천추사은사千秋謝恩使로 6개월여의 기간에 북경을 다녀오며 임무任務를 무난無難하게 수행隨行하였다.

함경감사 재직在職 중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정국政局 변동變動이 발생하였다. 공교롭게도 외직外職으로 나가있는 기간에 두 번이나 왕위王位가 교체交替되는 변화를 맞이했다.

인조즉위仁祖卽位로 혼란混亂한 정국에도 함경도 관찰사觀察使의 직임職任을 수행隨行하여 변방이 허술하지 도록, 방비책防備策을 강구하는 등 심혈을 기울렸다.

 

내직內職으로 돌아 온 후에는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이괄의 난李适 亂 시에 도원수都元帥로 임명任命되는 과정에서 조정대신朝廷大臣들의 전폭적인 지지支持와 인조仁祖의 신임信任을 얻었으며 반란叛亂을 진압鎭壓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대사헌 大司憲을 역임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때는 호태감湖太 , 접반사接伴使로 직임職任을 수행隨行하였다.

 

1630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 된 후,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거쳐 1636년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맞게 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의 경험이 있지만 정승政丞의 위치에 있어 책임이 막중하였다. 호란胡亂이 발발하자 화의교섭和議交涉이 시작 되었으나 주화主和와 척화斥和의 주장이 팽팽하여 강화교섭은 진척進陟을 보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대치對峙하며 국서國書를 주고 받으며 협상의 중책을 맡아 진행하였다.

 

공公은 청군진영淸軍陣營을 오가며 화의교섭和議交涉을 조절調節하고 명분을 유지維持하며 전쟁戰爭을 마무리하는 방안方案을 모색하여 사신의 임무任務를 수행隨行하였다.

 

공公은 명분名分없는 출성항복出城降伏은 반대하였다. 척화론斥和論의 주모자를 청군진영淸軍陣營 압송押送에도 반대하였고, 고령이므로 청에 압송을 면 할 수 있었다. 이후 정명원조征明援助, 포로교환捕虜交換, 연호年號 및 책봉冊封문제 등 복잡한 현안懸案을 안고, 1637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후 현명한 처리를 하고, 1638년 향년 77세로 서거逝去하시였다.

 

영의정領議政까지 오른 분으로 관직생활官職生活에 큰 허물이 없었던 것은 살아 생전 몸소 보여주었던 인품人品과 청렴淸廉한 관직관官職觀이 어려운 시기에도 흔들리지 았음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다.

공公은 진서眞書와 초서草書에도 뛰어나 명필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인조 대(仁祖 代)에 쓴 문묘중수비文廟重修碑의 글씨가 대표작代表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