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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png영의정領議政 노저鷺渚 양원陽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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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 중종 21~1592선조 25 8.7 별세

전주이씨全州李氏 양원陽元은 정종대왕定宗大王 4남 선성군宣城君의 5세손世孫으로 병산군말정의 손자 부父 이원부령利原副令 학정鶴丁과 모母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의 2남중 장남으로 중종년간中宗年  (AD 1526. 9. 19生-1592. 8. 7. 작고) 에 출생出生하였다. 자字는 백춘伯春 호號는 남파南坡로 쓰다가 후에 노저鷺渚로 개호改號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시다.

노저는 이소제履素齊 이중호李仲虎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문순공 퇴계文純公 退溪 이李선생 문하에서 종유從游했으며 한강 정술寒岡鄭述선생과 더불어 도의를 닦았다. 28세때(명종때 AD 1554년) 생원生員 진사進士양과에 급제하고 이어 30세때 (AD 1556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등제한 후, 한림翰林 호당湖堂, 전랑銓郞, 사인舍人 검상檢詳등을 역임하였다.

 

그후 선계변무차璿系辨誣次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파견(AD 1563년)되었고, 도승지都承旨(AD 1567년) , 경 상 , 전 라 평안도관찰사 , 송경유수松京留守, 형刑·병兵·이조吏曹판서,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계속 승차하여 우찬성,(AD 1590년) 우의정(AD 1591년)을 거쳐 수충익모광국공신輪忠翼謨光國功臣에, 그리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 및 동북면東北面 도감찰사都檢察使로 임명돼, 왜적과 싸울 명을 받았으나, 아무런 전쟁준비가 없어 후퇴하던중,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백석면白石面 연곡리 게네미 고개蟹踰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왜적을 크게 쳐부셨다.

그후 영의정에 특진되었고, 철령鐵嶺지방으로 옮겨 고수固守하다가 선조왕이 요동으로 건 가 내부內附하였다는 풍문이 전해지자 통탄을 금치 못하고, 8일간이나 단식하던 끝에 분사憤死하였다.(1592. 8. 7)

 

중국 명明나라 국사國史에 아我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고려 간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고려국왕高麗國王을 주살弑殺하였다고 잘못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러한 사서史書의 기록을 바로 잡아 줄것을 10여차에 걸쳐 사신使臣을 보내 간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 명종대왕明宗大王도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명明에 사신使臣을 파견하였다.(이를 선계변무璿系辨誣라 한다) 이때 이양원李陽元을 서장관으로, 금부金澍를 정사正使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금부金澍가 돌연히 병사病死함으로 노저 이양원李陽元이 그 직무를 대리하게 되었다. 노저 이양원李陽元은 성심 성의 전력을 기울여 명황제明皇帝 세종世宗을 감동시켜, 수백년 동안 조선왕조의 숙원사업이었던 선원세계璿源世系를 바르게 고칠것을 수락받고, 귀국하였다.

이에 우리 명종대왕明宗大王은 크게 기뻐하고, 노저 이양원李陽元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진시키고, 계속 승차되었다.

 

노저 이양원李陽元이 도승지都承旨로 재임중일때 명종대왕明宗大王이 경복궁景福官 침전에서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였다.(1567. 6. 28.)

이에 나라에서는 도승지都承旨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구朴素丘, 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 그리고 병조판서 원혼兵曹判書 元混과 같이 덕흥군德興君 사저에 가서 제3자인 하성군河成君을 모셔왔다.

이때 하성군의 나이가 16세였다. 어휘御諱를 연 으로 고치고, 대통大統을 잇게 하여, 선조대왕宣祖大王으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선조대왕이 즉위할때 부터 도승지로 있던 이양원은 경상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개성유수開城留守, 평양감사, 종2품 병조참판從2品 兵曹參判, 정2품 홍문관 대제학 正2品 弘文館 大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종1품 의정부 우찬성從1品 議政府 右贊成, 좌찬성左贊成, 정1품 의정부 우의정正1品 議政府 右議政 등 벼슬에 승차되었다.

이즈음 선조때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심한 당쟁이 벌어졌으나 노저는 불편부당不偏不黨 하였다.

이에 선조는 아로가鴉鷺 를 친히 지어 하사下賜하고, 노저의 진의를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노저는 주록가朱綠歌를 지어 올려 답하니, 선조는 공公이 당론黨論에 월하였음을 알으시고 더욱 총애하였다.

이에 공公은 남파南波로 쓰던 호號를 노저鷺渚로 개호改號하였다.

선조宣祖가 지어 하사下賜한 아로가鴉鷺 를 읽어본다.

 

아로가鴉鷺 

                선조대왕작宣祖大王 作

鴉兮莫黑 까마귀 검다 말고

鷺兮莫白 백로 희다 말라

黑白之紛兮 흑백이 하도 분여紛如하여

獨胡爲乎 내 알길이 없노메라

不黑不白 독수리는 어이 제홀로 검다 희다 다 하느냐.

 

다음은 노저 이양원李陽元이 선조대왕의 아로가鴉鷺 에 답하여 지어 올린 주록가朱綠歌를 읽어 본다.

 

주록가朱綠歌

                노저 양원 작鷺渚 陽元 作

謂朱非我兮 주홍朱紅도 내 아니요.

謂綠非我 록草綠도 내 아니요

朱綠之眩晃兮 주록朱綠의 현황眩晃함이

又非我之娜也 나의것이 더욱 아니니

君胡爲乎不我知 어찌하여 님은 나를 알지 못하고

謂我兮染夏. 날더러 오색五色에 물들다 하오니.

 

 

선조 25년(AD 1592)에 일본日本이 조선朝鮮을 침략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공公은 유도대장留都大將 겸 동북면東北面(강원, 함경도) 도감찰사都檢察使로 임명 받았다. 이때 선조는 의주義州로 몽진하였다. 이 와중에 성城안의 난민亂民들은 종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비롯하여 장예원, 형조등 각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질러 전 도성全 都城이 불바다가 되었다.

도원수 김명원都元帥 金命元은 왜군과 일전一戰도 해보지도 못하고, 한강漢江 방어선을 포기하고 임진강 으로 물러 섰었다.

이에 공은 동북면東北面을 방어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작전상 양주楊州로 가 의병義兵을 모아 일으켰다. 공公은 부원수 신각副元帥 申 , 남병사 이혼南兵使 李渾, 광주부사 이시언廣州府使 李時言과 합류하여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해유현(게네미 고개)에서 왜장 임길성森吉成을 맞아 일전一戰을 벌였다. 왜군 72명을 참수하고 많은 전리품戰利品을 얻어 냈다.

왜군이 4월에 부산釜山에 상륙하여 대소大小전투를 벌였으나, 처음으로 이 전투가 임진왜란중壬辰倭亂中 왜군과 싸워 이긴 최 의 양주楊州대첩이다.

이 대첩의 승전보를 받은 선조는 크게 기뻐하고, 노저를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특진시켰다.

 

지금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백석면白石面 연곡리蓮谷里(게네미 고개)에는 조그만한 비석碑石이 하나 세워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해유전승蟹踰戰勝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7년 4월 21일 경기도청과 지방유지들이 세워 현재 지방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유전첩비문蟹踰戰捷碑文의 글을 옮긴다.

…전략前略…

한편 침략한 왜군의 북상北上으로 서울방어가 무 지자 도원수 신각都元帥 申 장군은

유도대장留都大將 겸 도검찰사 이양원都檢察使 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로 후퇴하여 군사를 재정비 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함경도 병사 이혼兵使 李渾이 서울방비의 후원군을 거느리고 오다가 서로 만나 합동작전을 위해 대오隊伍를 편성하였다. 이때 서울에 입성入城한 왜군은 전렬을 가다듬고 양주 방면으로 북침하여 인근지역을 침략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신申장군은 적정 탐정후 서기 1592년 5월중순에 왜적통로인 해유현蟹踰峴 부근에 잠복하였다. 이 때 왜군이 통과하자 이를 완전 포위후 사방에서 일제히 맹공하여 순식간에 70여명을 베어 버렸다. …(中略)…

 

6월에 公은 다시 철령鐵嶺(함경남도 안변)으로 진주하면서 대소전투를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경기·강원 양도에 왕세자 광해군王世子 光海君이 백관百官을 분솔하고, 왕명王命을 권섭대리權攝代理하는 기관으로 분조分朝를 강원도 이천伊川에 설치하였다. 공도 분조分朝에 주둔하여 있던 중, 뜻밖에도 왜군이 평양을 점령해 정부가 당황하여 선조宣祖를 모시고 압록강을 건 요동安東縣으로 간다는 묘의廟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내부內附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길이 막혀 연락할 방법이 막연하였다. 그런데 이미 선조宣祖가 압록강을 건 요동에 이르렀다는 풍설風說을 듣고 공은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내가 서울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책임을 완수하지 못해, 임금님이 압록강을 건 요동에 이르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오직 한번 죽어 보국報國할 따름이니라”라고 말한 후

통한제설痛恨涕雪하고 8일간八日 을 절식絶食하여 구혈수승嶇血數升한 후 분조군중分朝軍中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향년享年 67세였다.(1592. 8. 7)